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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맨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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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키 맨틀은 1931년 오클라호마주에서 태어나 1995년 사망한 미국의 야구 선수이다. 그는 뉴욕 양키스에서 1951년부터 1968년까지 활약하며 3번의 아메리칸 리그 MVP, 1956년에는 타율 0.353, 52홈런, 130타점으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또한 통산 536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월드 시리즈에서 18개의 홈런과 40타점을 기록했다. 잦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그는 1974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1969년 그의 등번호 7번은 뉴욕 양키스에서 영구 결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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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맨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7년의 미키 맨틀
1957년의 미키 맨틀
포지션중견수
타석스위치
투구우투
출생일1931년 10월 20일
출생지미국 오클라호마주 스파비나우
사망일1995년 8월 13일
사망지미국 텍사스주 댈러스
선수 경력
데뷔 리그MLB
데뷔일1951년 4월 17일
데뷔 팀뉴욕 양키스
최종 리그MLB
최종일1968년 9월 28일
최종 팀뉴욕 양키스
뉴욕 양키스 (1951–1968)
통계
리그MLB
타율.298
안타2,415
홈런536
타점1,509
수상 및 업적
올스타20회 (1952–1965, 1967, 1968)
월드 시리즈 우승7회 (1951–1953, 1956, 1958, 1961, 1962)
AL MVP3회 (1956, 1957, 1962)
트리플 크라운1956
골드 글러브상1962
AL 타격 챔피언1956
AL 홈런 리더4회 (1955, 1956, 1958, 1960)
AL 타점 리더1956
뉴욕 양키스 No. 7영구 결번
모뉴먼트 파크헌액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 센추리 팀선정
명예의 전당
종류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년도1974
득표율88.2% (첫 번째 투표)

2. 생애 초기

맨틀의 소년 시절 집, 오클라호마 주 코머스


미키 맨틀은 1931년 10월 20일 오클라호마주 스파비노에서 태어났다.[3] 아버지는 엘빈 찰스 맨틀, 어머니는 로벨 맨틀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Mutt"(잡종개)라는 별명을 가진 아마추어 야구 선수였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의 명포수 미키 코크레인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미키라고 지었다.[3] 만년의 맨틀은 아버지가 코크레인의 본명을 몰랐던 게 다행이라면서, 안 그랬으면 Gordon이라는 짜증나는 이름이 될 뻔했다고 회고했다.

맨틀은 아버지에 대해 늘 따뜻하게 말했고,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이라고 했다. "어떤 소년도 저처럼 아버지를 사랑하지는 못했을 겁니다."라며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맨틀이 메이저 리그 선수가 된 지 얼마 안 된 1952년에 호지킨 림프종으로 3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맨틀이 4살 때 가족은 오클라호마 주 커머스 근처로 이사했다.[2] 맨틀은 커머스 고등학교에서 야구, 농구, 풋볼 등 다양한 운동에 재능을 보였다. 특히 풋볼에서는 오클라호마 대학교에서 장학금 제의를 받기도 했다.[4] 그러나 풋볼 경기 중 정강이를 차여 골수염에 걸렸는데, 당시에는 페니실린이 막 사용되기 시작하여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3] 하지만 이 병의 후유증은 그를 늘 괴롭혀 잦은 부상의 원인이 되었고, 야구 선수 생활에 큰 장애물이 되었다. 이 때문에 군입대가 면제되었는데, 이는 선수 생활 초기에 그가 인기 없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맨틀에게는 어머니의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두 명의 이복 형제인 테드와 안나 베이 데이비스가 있었고, 4명의 친동생이 있었다: 쌍둥이 형제 레이와 로이, 형제 래리, 여동생 바바라.[2]

맨틀은 아주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스위치 히터 훈련을 받았다. 맨틀은 나중에 아버지와 맞서 좌타로 타격하고, 할아버지 찰스 맨틀과 맞서 우타로 타격했던 것을 회상했다.[3]

후년에 맨틀은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어릴 때 이복 누나 안나 베이에게 성적 학대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또한 안나 베이의 친구들과 동네의 나이 많은 남자들을 포함한 다른 어른들에게도 학대를 받았다고 한다.[5] 그의 아내 멀린은 나중에 맨틀이 미성년이었을 때 고등학교 선생님과 성관계를 가졌다고 회상했다. 멀린에 따르면, 그 선생님은 그를 "유혹"했고, "그녀는 그 위에 누웠다."[6]

제인 레비는 맨틀이 아동 성 학대로 인해 복합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했다.[7]

3. 선수 생활

미키 맨틀은 캔자스 주 박스터 스프링스의 세미 프로 팀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48년 양키스 스카우터 톰 그린웨이드는 스위치 히터로 장외 홈런을 두 개나 날린 맨틀에게 주목했다. 그린웨이드는 재키 로빈슨 영입에 공헌한 인물로, 맨틀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봤다.[148] 훗날 그는 맨틀을 자신이 본 최고의 유망주였다고 회상했다.

1949년, 맨틀은 양키스 산하 Class-D 마이너리그팀과 계약금 1100USD(현재 가치 10134USD), 잔여 시즌 연봉 400USD(현재 가치 4606USD)에 계약을 맺었다.[148] 빠른 발 덕분에 "The Commerce Comet(혜성)"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조플린 마이너스(Joplin Miners)로 승격되었다.[148]

1951년 4월 7일, 등번호 6번을 달고 우익수로 메이저 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케이시 스텡걸 감독은 "좌우 타석 모두에서 최고의 파워를 갖고 있다"라고 평가했고, 조 디마지오는 "최고의 유망주"라고 칭찬했다.

슬럼프를 겪은 맨틀은 캔자스시티 블루스로 내려갔지만, 좌절한 그는 아버지에게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겁쟁이를 키웠다"며 광산 일을 하자고 했고, 이 말을 들은 맨틀은 슬럼프를 탈출, 40경기 후 메이저 리그로 복귀했다.[3]

1951년 10월 4일, 뉴욕 자이언츠와의 월드시리즈에서 팀은 우승했지만, 맨틀의 성적은 평범했다. 1952년, 디마지오의 은퇴로 중견수로 이동한 맨틀은 1965년까지 중견수로 활약하다 좌익수를 거쳐 마지막 2년은 1루수로 뛰었다. 그는 월드시리즈 통산 18홈런, 42득점, 40타점 등 여러 기록을 세웠다.

맨틀은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장 비거리 홈런 기록으로 유명하다. 1960년 9월 10일 타이거 스타디움 홈런은 196m, 그리피스 스타디움(Griffith Stadium) 홈런은 172m로 측정되었다. 양키 스타디움에서 한 경기 2개의 장외 홈런을 날린 유일한 선수이다. 1963년 5월 22일, 190m 홈런은 34m 높이의 외벽을 때렸다는 논쟁이 있다. 1964년 8월 12일에는 141m 거리의 백스크린을 넘기는 홈런을 쳤다.

좌우 타석 모두에서 강력한 파워를 지녔지만, 자신은 우타석을 선호했다. 그러나 우투수가 많아 좌타석에 더 많이 들어섰고, 좌타 홈런(372개)이 우타 홈런(164개)보다 많았다. 좌타 홈런 상당수는 좌타자에게 유리했던 양키 스타디움에서 나왔다.

1956년, 타율 0.353, 52홈런, 130타점으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 히칵 벨트(Hickok Belt)를 수상하고 첫 MVP 시즌을 보냈다. 1957년, 타율 0.365를 기록, 테드 윌리엄스에 이어 2위를 기록했지만, MVP 득표에서 윌리엄스를 제치고 두 번째 MVP를 수상했다.

1961년 1월 16일, 양키스와 75000USD(현재 가치 550614USD)의 연봉 계약을 맺었다. 1964년 월드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패배했다.

1965년, 부상으로 팀은 6위로 추락했고, 개인 성적도 타율 0.255, 19홈런에 그쳤다. 1966년 이후 1루수로 전향한 양키스는 침체기에 들어섰다.

맨틀의 마지막 홈런은 1968년 9월 20일, 보스턴의 짐 론보그에게서 때려낸 솔로 홈런이었다.

1951년

3. 1. 마이너 리그 (1948–1950)

미키 맨틀은 준프로 야구팀인 캔자스의 박스터 스프링스 위즈 키즈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3] 1948년, 뉴욕 양키스 스카우트 톰 그린웨이드(Tom Greenwade)는 맨틀의 팀 동료를 관찰하러 왔다가 스위치 히터로 장외 홈런을 두 개나 날린 맨틀에게 흥미를 느꼈다.[3] 그린웨이드는 맨틀의 고등학교 졸업 후인 1949년에 그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었다.[8]

맨틀은 양키스 산하 Class-D 마이너리그팀과 1100USD (현재 가치로는 10134USD) 계약금에 잔여 시즌 동안 400USD (현재 가치로는 4606USD) 연봉 계약을 맺었다.[8] 캔자스-오클라호마-미주리 리그(Kansas–Oklahoma–Missouri League) 소속 인디펜던스 양키스에 배정되어 유격수로 활약하며 타율 0.313을 기록했다.[9] 1949년 6월 30일, 인디펜던스의 슐시스 스타디움(Shulthis Stadium)에서 프로 첫 홈런을 쳤는데, 공은 홈 플레이트에서 약 140.21m 떨어진 중견수 펜스를 넘어갔다.[10] 1950년, 맨틀은 C급 웨스턴 어소시에이션(Western Association) 소속 조플린 마이너스(Joplin Miners)로 승격되어 타율 0.383으로 웨스턴 어소시에이션 타격왕을 차지했다. 그는 26개의 홈런과 136타점을 기록했지만, 유격수로서 수비에는 어려움을 겪었다.[9]

1950년 7월, 한국 전쟁이 시작된 후, 맨틀은 징병 대상이 되었으나 왼쪽 다리 골수염 상태로 인해 군 복무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다.[11]

3. 2. 메이저 리그 (1951–1968)

맨틀의 첫 세미 프로 팀은 캔자스주 박스터 스프링스 위즈 키즈였다. 1948년 양키스 스카우터 톰 그린웨이드(Tom Greenwade)는 박스터 스프링스에서 스위치 히터로 장외 홈런을 두 개나 날린 맨틀에게 흥미를 느꼈다. 그린웨이드는 재키 로빈슨로이 캄파넬라에 대해 호의적인 리포트를 작성할 정도로 유망주를 찾아내는 안목이 탁월했고, 맨틀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148] 훗날 그린웨이드는 맨틀을 자기가 본 유망주 중 최고였다고 회고했다. 당시 16살이었던 맨틀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1949년까지 계약을 맺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맨틀은 캔자스 주 인디펜던스에 있는 양키스 산하 Class-D 마이너리그팀과 1100USD 계약금(현재 가치 10134USD)과 잔여 시즌 연봉 400USD(현재 가치 4606USD)에 계약을 맺었다. 맨틀은 빠른 주력 덕분에 "The Commerce Comet(혜성)"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미주리주 조플린에 있는 조플린 마이너스(Joplin Miners)로 승격되었다.[148]

1951년 4월 7일, 맨틀은 등번호 6번을 달고 우익수로 메이저 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케이시 스텡걸 감독은 "내가 여태까지 봐온 선수 중에 좌우 타석 모두에서 최고의 파워를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조 디마지오는 "내가 기억하는 한 최고의 유망주"라고 칭찬하였다.

잠시 슬럼프를 겪은 맨틀은 캔자스시티 블루스로 내려갔지만, 슬럼프를 탈출할 수 없었다. 좌절한 맨틀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말했고, 아버지는 캔자스시티로 찾아와 "겁쟁이를 키웠다"며 광산 일을 하자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맨틀은 슬럼프를 탈출, 캔자스시티에서 타율 0.361, 11홈런, 50타점을 기록하고 40경기 후 메이저 리그로 재승격되었다.[3]

1951년 10월 4일, 뉴욕 자이언츠와의 월드시리즈에 출전한 맨틀의 팀은 4승 2패로 챔피언이 됐으나, 맨틀의 성적은 평범하였다.

1952년, 디마지오의 은퇴로 맨틀은 중견수로 포지션을 이동했다. 이후 1965년까지 중견수로 뛰다 좌익수로 옮겼고, 선수생활 마지막 2년 동안은 1루수로 뛰었다. 이 기간 동안 맨틀은 월드시리즈 통산 18홈런, 42득점, 40타점 등 여러 기록을 세웠다.

맨틀은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장 비거리 홈런 기록으로도 유명하다. 1960년 9월 10일 타이거 스타디움 우측 지붕 너머로 날린 홈런은 196m로 추정되었다. 그리피스 스타디움(Griffith Stadium)에서 척 스톱스(Chuck Stobbs)를 상대로 때린 홈런은 172m로 측정되었다. 양키 스타디움 외야 관중석 3층 너머로 2개의 홈런을 날려, 한 경기 2개의 장외 홈런을 때린 유일한 선수이다. 1963년 5월 22일, 빌 피셔(Bill Fischer)를 상대로 날린 190m 홈런은 34m 높이의 외벽을 때렸다는 논쟁이 있다. 1964년 8월 12일에는 141m 거리의 백스크린을 넘기는 홈런을 쳤다.

맨틀은 좌우 타석 모두에서 강력한 파워를 지녔지만, 자신은 우타석을 선호했다. 그러나 좌타석에서 372홈런, 우타석에서 164홈런을 기록했는데, 이는 우투수가 많아 좌타석에 더 많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또한, 좌타 홈런 상당수는 베이브 루스 이래로 좌타자에게 유리했던 양키 스타디움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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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월드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3승 4패로 패배했다.

1965년 시즌, 맨틀의 부상으로 팀은 6위로 추락했고, 개인 성적도 타율 0.255, 19홈런에 그쳤다. 1966년 이후 1루수로 전향한 양키스는 조지 스타인브레너 인수 전까지 침체기에 들어섰다.

맨틀의 마지막 홈런은 1968년 9월 20일, 보스턴의 짐 론보그에게서 때려낸 솔로 홈런이었다.

3. 2. 1. M&M 타선 (1961년)

1961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 동안 맨틀과 팀 동료 로저 매리스는 M&M Boys로 알려졌으며, 1927년 베이브 루스가 세운 한 시즌 60홈런 기록에 도전했다.[41] 5년 전, 맨틀은 시즌 대부분 동안 루스의 기록에 도전했고, 뉴욕 언론은 그 당시 루스를 신성시했다. 맨틀이 결국 52홈런으로 기록에 미치지 못하자 많은 기자들이 안도했다. 뉴욕 언론은 맨틀이 양키스에서 활약한 초창기에 그를 가혹하게 다루며, 그가 잦은 삼진, 부상, 오클라호마 출신의 시골뜨기이며 조 디마지오보다 열등하다고 여겨진다는 점을 강조했다.[41]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맨틀은 뉴욕 언론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고 언론의 호의를 얻었으며, 퀸스 출신의 팀 동료 화이티 포드의 도움을 받았다.[42]

맨틀과 달리 매리스는 뉴욕에 처음 온 선수였다. 그는 1960 시즌 전에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에서 양키스로 트레이드되었고, 뉴욕 언론의 요구에 적응하지 못했다. 많은 언론은 그를 무뚝뚝하고 무례하게 보기 시작했다. 1961 시즌 동안 언론은 양키스가 맨틀의 팀이라는 인식을 밀어붙였고, 매리스는 종종 외부인으로 경멸당하고 따돌림을 당했으며, "진정한 양키"가 아니라고 여겨졌다.[43]

시즌 말, 맨틀은 엉덩이에 심각한 농양성 패혈증 감염으로 입원했다. 이 감염은 양키스 해설자 멜 앨런의 추천으로 의사 맥스 제이콥슨으로부터 받은 "기적 주사"로 인해 발생했다.[45] 매리스가 시즌 마지막 날에 기록을 깨뜨린 반면, 맨틀은 54홈런으로 마감했으며, 이는 스위치히터의 단일 시즌 기록이었다. 그는 또한 득점과 볼넷에서 아메리카 리그(AL)를 이끌었다. 그는 2년 연속으로 세 번째 MVP 수상을 놓쳤고, 매리스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28] 랄프 호크 신임 감독 아래, 양키스는 그 해 1961년 신시내티 레즈 시즌에서 신시내티 레즈를 상대로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했다. 맨틀과 매리스는 시리즈에서 모두 부진하여 5경기 25타수에서 3안타 2타점을 기록했다.[47]

로저 매리스와 맨틀, 1961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의 역사적인 순간, 두 사람 모두 베이브 루스의 홈런 기록을 추격했다.


로저 매리스와의 콤비가 '''MM포'''로 불리게 되었다. 익스팬션으로 10개 구단으로 늘어난 1961년에는 두 선수 모두 개막부터 홈런을 양산하여, 베이브 루스가 가지고 있던 시즌 60홈런 기록을 깰 수 있을지 주목을 받았다. 결국 61홈런을 기록한 매리스가 기록을 갱신했지만, 맨틀도 커리어 하이인 54홈런을 기록했다. 같은 팀의 두 선수의 홈런 합계 115개는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MVP 투표에서는 매리스와 불과 4포인트 차이로 2위에 머물러 수상에 실패했다.[157]

3. 2. 2. 부상과 은퇴



맨틀은 1951년 시즌 전 양키스 훈련 캠프에 초청받았고,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 동안 큰 인상을 남겼다. 보바드 필드에서 USC 트로잔스 야구팀을 상대로 두 개의 홈런을 친 일화는 유명하다. 두 홈런 모두 최소 약 152.40m 이상을 날아갔다고 한다.[12] 19세의 젊은 선수에게 감명받은 양키스 감독 케이시 스텡겔은 맨틀을 마이너리그로 보내는 대신 우익수로 메이저리그로 승격시켰다. 1951년 시즌 그의 연봉은 7500USD였다.[13] 맨틀은 베이브 루스(3번), 루 게릭(4번), 조 디마지오(5번)에 이어 그가 다음 양키스 스타가 될 것이라는 기대 속에 등번호 6번을 받았다.[3]

잠시 부진에 빠진 후 맨틀은 양키스의 최고 팜팀인 캔자스시티 블루스로 내려갔다. 타석에서 고전하자 좌절한 그는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더 이상 야구를 할 수 없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아버지 머트 맨틀은 캔자스시티로 가서 아들에게 "나는 남자를 키운 줄 알았는데. 겁쟁이를 키웠다는 걸 알게 되었어. 오클라호마로 돌아와서 나와 함께 광산에서 일하면 된다."라고 질책했다. 그 후 맨틀은 점차 부진에서 벗어나 캔자스시티에서 3할 6푼 1리의 타율과 11개의 홈런, 50타점을 기록했다.[3]

맨틀은 캔자스시티에서 40경기를 뛴 후 양키스로 콜업되었고, 유니폼 7번을 입었다. 양키스가 뉴욕 자이언츠를 상대로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을 때 그는 96경기에서 타율 2할 6푼 7리, 13개의 홈런, 65타점을 기록했다.[15] 1951년 월드 시리즈 2차전에서 자이언츠의 신인 윌리 메이스가 우중간으로 플라이볼을 쳤다. 우익수였던 맨틀은 중견수 디마지오와 함께 공을 향해 달려갔다. 마지막 순간에 디마지오가 공을 외쳐, 그의 진로를 방해하지 않으려던 맨틀의 스파이크가 노출된 배수관에 걸려 넘어졌다. 그의 무릎은 부자연스럽게 꺾였고 그는 즉시 쓰러져 오른쪽 무릎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맨틀은 들것에 실려 경기장을 나가야 했다. 이것은 양키스에서 18년의 선수 생활을 괴롭힌 수많은 부상 중 첫 번째였다. 그는 찢어진 전방 십자 인대(ACL)를 안고 선수 생활을 해야 했다.[16]

경기가 끝난 후 맨틀의 아버지는 아들을 병원으로 데려갔다. 두 사람은 같은 병실에 입원하여 나머지 월드 시리즈를 함께 시청했다. 머트 맨틀은 호지킨 림프종 진단을 받았고, 1952년 5월 7일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

1961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 동안 맨틀과 팀 동료 로저 매리스는 M&M Boys로 알려졌으며, 1927년 베이브 루스가 세운 한 시즌 60홈런 기록을 추격했다. 5년 전, 맨틀은 시즌 대부분 동안 루스의 기록에 도전했고, 뉴욕 언론은 그 당시 루스를 보호했다. 맨틀이 결국 52홈런으로 기록에 미치지 못하자 많은 기자들이 안도했다. 뉴욕 언론은 맨틀이 양키스에서 활약한 초창기에 그를 가혹하게 다루며, 그가 잦은 삼진, 부상, 오클라호마 출신의 시골뜨기이며 디마지오보다 열등하다고 여겨진다는 점을 강조했다.[41]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맨틀은 뉴욕 언론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고 언론의 호의를 얻었으며, 퀸스 출신의 팀 동료 화이티 포드의 도움을 받았다.[42]

맨틀과 달리 매리스는 뉴욕 무대에 처음 등장했다. 그는 1960 시즌 전에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에서 양키스로 트레이드되었고, 뉴욕 언론의 요구에 적응하지 못했다. 많은 언론은 그를 무뚝뚝하고 무례하게 보기 시작했다. 1961 시즌 동안 언론은 양키스가 맨틀의 팀이라는 인식을 밀어붙였고, 매리스는 종종 외부인으로 경멸당하고 따돌림을 당했으며, "진정한 양키"가 아니라고 여겨졌다.[43]

시즌 말, 맨틀은 엉덩이에 심각한 농양성 패혈증 감염으로 입원했다. 이 감염은 양키스 해설자 멜 앨런의 추천으로 의사 맥스 제이콥슨으로부터 받은 "기적 주사"로 인해 발생했다.[45] 수년 후 제이콥슨의 소위 "기적 주사"에는 실제로 암페타민메스암페타민을 포함한 다양한 물질이 들어 있었고, 최소한 한 명의 사망자를 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폭로로 제이콥슨은 사기꾼으로 드러났고 1975년에 의사 면허를 박탈당했다.[46]

매리스가 시즌 마지막 날에 기록을 깨뜨린 반면, 맨틀은 54홈런으로 마감했으며, 이는 스위치히터의 단일 시즌 기록이었다. 그는 또한 득점과 볼넷에서 아메리카 리그(AL)를 이끌었다. 그는 2년 연속으로 세 번째 MVP 수상을 놓쳤고, 매리스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28] 랄프 호크 신임 감독 아래, 양키스는 그 해 1961년 신시내티 레즈 시즌에서 신시내티 레즈를 상대로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했다. 맨틀과 매리스는 시리즈에서 모두 부진하여 5경기 25타수에서 3안타 2타점을 기록했다.[47]

미키 맨틀의 선수 경력은 부상으로 얼룩졌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는 다리의 뼈와 연골에 급성 및 만성 부상을 모두 입었다. 선수 경력 말년에는 단순히 배트를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고통에 무릎을 꿇을 정도였다.[78] 1951년 월드 시리즈에서 맨틀이 입은 오른쪽 무릎의 연골 파열은 매우 심각했다. 목격자들은 "총에 맞은 것 같았다"고 말했다.[80] 전미 풋볼 리그 선수 협회의 전 의무 책임자인 스티븐 하스 박사는 그 당시 맨틀이 ACL을 다쳤고, 당시에는 ACL을 수술로 치료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채 선수 생활을 계속했다고 추측했다.[81] 1953년에 시행된 수술은 관절의 추가적인 침식을 막기 위해 찢어진 연골을 제거했지만, 무릎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그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양키스 트레이너들은 나중에 그의 무릎을 운동용 테이프로 꽉 감았다. 부상 이후 동료들은 맨틀의 보행 변화와 속도 저하를 알아챘다.[82] 심각한 무릎 부상에도 불구하고 맨틀은 여전히 "1루까지 가장 빠른 사나이"로 알려졌으며, 한때 1루에 3.1초 만에 도달한 기록이 보고되었다.[83] 그러나 양키스 감독들은 그의 "섬세한" 무릎이 더 빨리 망가질 것을 우려하여 그에게 도루를 금지했다.[84]

1957년 월드 시리즈에서 맨틀이 입은 어깨 부상은 그의 기록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그 후 10년간 왼쪽 타석에서의 타격에 어려움을 더했다.[85] 1964년 1964년 월드 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대결하여, 3차전, 6차전, 7차전에서 맨틀은 마지막이 된 시리즈 홈런을 쳤지만, 루 브록, 켄 보이어, 커트 플러드, 밥 깁슨을 보유한 카디널스에게 결국 3승 4패로 패했다. 이후, 양키스는 오랜 침체기에 접어들었고, 맨틀은 팀 상황과 자신의 육체적인 쇠퇴로 인해 은퇴 시기를 놓치게 되었다. 후년, 맨틀은 현역 생활을 이 1964년으로 끝냈어야 했다고 회고했다. 그 이유는 이 해 이후, 타율이 0.230에서 0.280대밖에 기록하지 못했고, 통산 타율이 0.300을 넘지 못한 것에 대해 매우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7년에는 통산 500호 홈런을 달성했고, 같은 해 양키스는 지구 최하위로 추락하여 최악의 상황 속에서 밝은 소식이었다. 마지막 시즌이 되는 1968년에는 0.230대로 자기 최저 타율을 기록했고, 결국 다음 해 1969년 시즌 전에 현역 은퇴를 표명했다. 은퇴 당시에는 만신창이의 몸이었고, 현역 시절은 부상과의 싸움이었지만, 양키스 한 팀에서만 선수 생활을 했다. 등번호 "'''7'''"은 은퇴를 표명한 1969년에 양키스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맨틀의 등번호 "'''7'''".
뉴욕 양키스의 영구 결번으로 1969년 지정.

4. 은퇴 이후

1969년 3월 1일, 맨틀은 은퇴를 발표했다. 5년 후, 그는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고, 양키스는 그의 등번호 7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61] 1969년 NBC에서 파트타임으로 올스타전과 Game of the Week 해설을 맡았고, 1972년에는 몬트리올 엑스포스 해설을 하기도 했다.

자유계약 제도가 도입되기 전에도 많은 연봉을 받았지만, 사업 감각이 부족하여 몇 건의 투자 실패를 겪었다. 그러나 스포츠 기념품 사업에서 그의 위상은 1980년대부터 더욱 커져, 그의 아이템은 베이브 루스를 제외하고는 어떤 선수보다도 많이 판매되었다.

1970년대 컨트리 음식점 사업 실패에도 불구하고, 1988년 뉴욕에 '미키 맨틀의 레스토랑 & 스포츠 바'를 열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식당 입구에는 양키 스타디움 모뉴먼트 파크의 오리지널 명판이 전시되어 있었다.

1983년, 뉴저지주 애틀랜틱 시티 리조트 카지노에서 고객 담당 대표로 일하면서, MLB 커미셔너 보위 쿤에 의해 야구계에서 영구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다. 도박 관련 조직에 있으면 안 된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쿤은 경고했지만, 맨틀은 이를 무시했고, 윌리 메이스도 비슷한 이유로 자격 정지를 당한 적이 있었다. 1985년 3월 18일, 쿤의 후임 커미셔너인 피터 위버로스(Peter Ueberroth)에 의해 자격이 회복되었다.[96]

1973년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올드 타이머스 게임에서 맨틀은 오른손 타자로 자신의 옛 팀 동료인 화이티 포드와 대결했다. 그는 불펜 옆 약 122.53m 표지판 너머로 긴 홈런을 쳤는데, 이것이 양키 스타디움에서의 마지막 홈런이었다.[91]

1976년 맨틀 가족은 미국 독립 기념일을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 대통령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 국빈 방문을 왔을 때 백악관에 초대된 명예 손님 중 한 명이었다.[93]

포드 대통령,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과 함께한 맨틀 (1976년 백악관)


1995년 4월 19일 오클라호마 시티 폭탄 테러 이후, 맨틀은 동료 오클라호마 출신이자 양키스 선수인 바비 머서와 함께 희생자들을 위한 기금 마련에 참여했다.[98]

5. 개인사

미키 맨틀은 오클라호마주 스파비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엘빈 찰스 맨틀은 "Mutt"(잡종개)라는 별명을 가진 아마추어 야구 선수였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미키 코크레인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미키라고 지었다. 맨틀은 늘 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이라고 칭송했고, "어떤 소년도 저처럼 아버지를 사랑하지는 못했을 겁니다."라며 존경을 표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1952년 호지킨 림프종으로 3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맨틀이 4살 때 가족은 오클라호마 주 커머스로 이사했다. 맨틀은 커머스 고등학교에서 야구, 농구, 풋볼 등 다양한 스포츠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특히 풋볼에서는 오클라호마 대학에서 장학금 제의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풋볼 경기 중 정강이를 다쳐 골수염에 걸렸다. 당시에는 페니실린 덕분에 치료가 가능했지만, 후유증으로 잦은 부상을 겪으며 선수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 부상으로 군 면제를 받았는데, 이는 선수 생활 초기에 그가 인기를 얻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51년 12월 23일, 맨틀은 메를린 존슨과 결혼하여 네 아들을 두었다. 미키 주니어(1953년생), 데이비드(1955년생), 빌리(1957년생, 빌리 마틴의 이름을 따서 지음), 대니(1960년생)가 그들이다.

맨틀은 자서전에서 아버지의 강요로 메를린과 결혼했다고 밝혔다. 그는 생전에 잦은 음주와 불륜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1969년 은퇴식에는 아내와 정부를 함께 데려오는 등 신중하지 못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1980년, 맨틀은 아내와 별거에 들어갔지만, 이혼하지는 않았다. 마지막 며칠 동안 두 사람은 화해했고, 메를린은 맨틀의 임종을 지켰다.

맨틀은 생의 마지막 10년 동안 그의 에이전트이자 동거인인 그리어 존슨과 함께 살았다. 맨틀의 사후, 그의 가족은 존슨이 맨틀의 개인 소지품을 경매에 부치는 것을 막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일부 판매를 허용하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말년에 맨틀은 조지아주 그린즈버러 근처 오코니 호수에 콘도를 구입하여 생활했다. 그는 가끔 지역 감리교 교회에 출석했고, 주민들과 식사를 하기도 했다. 그린즈버러 사람들은 맨틀의 사생활을 존중하며 그를 따뜻하게 대했다. 맨틀은 한 인터뷰에서 "그린즈버러 사람들은 나를 환영하기 위해 애썼고, 어릴 때부터 즐기지 못했던 것을 거기에서 찾았다"고 말했다.

맨틀은 배우, 음악가, 리얼리티 텔레비전 출연자인 켈리 맨틀의 삼촌이었다.

맨틀의 어린 시절 친구 닉 퍼거슨에 따르면, 만틀의 아버지는 종종 그들을 데리고 나가 만틀이 미성년자였음에도 아들에게 맥주를 사주곤 했다. 또한, 알코올 중독은 그의 어머니 쪽 집안 내력으로, 만틀의 외가 친척 여러 명이 이 질환으로 사망했다.[105]

맨틀 자신도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했다. 그는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기 전, 자신의 힘든 생활이 경기력과 가족 모두에게 해를 끼쳤다고 인정했다. 그는 가족력이 있어 자신도 젊은 나이에 죽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의 아버지와 삼촌 모두 40대 초반에 호지킨 림프종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당시 맨틀은 가족 대부분이 광산에서 일하며 납과 아연 먼지를 흡입했고, 이것이 호지킨 림프종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106]

맨틀의 아내와 세 아들 또한 알코올 중독자였다. 멀린, 미키 주니어, 데이비드는 모두 알코올 중독 치료를 마쳤고, 맨틀에게도 똑같이 할 것을 간청했다. 의사는 거의 40년 동안 술을 마신 맨틀의 간이 너무 심하게 손상되어 "다음 술이 마지막 술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111] 결국 맨틀은 1994년 1월 7일 베티 포드 클리닉에 입원했다.[107] 그의 친구이자 스포츠 해설가인 팻 서머럴도 그가 클리닉에 들어가도록 도왔다.[108]

맨틀이 치료를 마친 직후, 그의 아들 빌리가 1994년 3월 12일 경찰 구금 중에 사망했다.[109] 주변 사람들은 이 비극이 맨틀을 다시 술로 돌아가게 할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그는 남은 생애 동안 술을 끊고 지냈다.[3] 이후 미키 주니어는 아버지처럼 수년간의 알코올 남용으로 인한 간암으로 2000년 12월 20일 사망했다.[110]

1994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표지 기사에서 맨틀은 자신의 음주에 대해 후회하며, 가족, 친구, 팬들에게 상처를 준 것을 바로잡으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는 전 팀 동료이자 침례교 목사인 바비 리처드슨의 영향으로 거듭난 기독교인이 되었다.[111]

6. 사망

미키 맨틀은 알코올 중독과 간 질환으로 오랜 투병 생활을 했다. 그의 가족 중 많은 이들이 알코올 중독으로 고통받았고, 아버지와 삼촌은 호지킨 림프종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맨틀은 자신도 젊어서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오랫동안 술에 의존했다.[106]

1994년 1월 7일, 맨틀은 베티 포드 클리닉에 입원하여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았다. 그의 친구이자 스포츠 해설가인 팻 서머럴이 그를 설득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107][108] 치료 직후, 그의 아들 빌리가 1994년 3월 12일 약물 남용으로 사망했지만, 맨틀은 남은 생애 동안 술을 끊었다.[109][3] 그러나 2000년 12월 20일, 또 다른 아들 미키 주니어가 간암으로 사망했다.[110]

1995년 초, 맨틀은 간경변, C형 간염, 간암 진단을 받고 간 이식이 필요하게 되었다.[112] 1995년 6월 8일 댈러스의 베일러 대학교 메디컬 센터에서 이식 수술을 받았으나, 이 과정에서 그의 명성 때문에 특혜를 받았다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113]

회복 후 맨틀은 장기 기증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미키 맨틀 재단을 설립하고, 팬들에게 자신처럼 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다.[114] 그러나 암은 이미 전신으로 퍼져 있었고, 1995년 8월 13일 베일러 대학교 메디컬 센터에서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17]

그의 장례식은 댈러스의 러버스 레인 연합 감리교회에서 열렸고, 밥 코스타스는 그를 "논리를 거스르는 강하고 지속적인 감정적 애착을 가졌던 연약한 영웅"이라고 묘사하며 추모했다.[121] 맨틀은 댈러스의 스파크만-힐크레스트 메모리얼 파크 묘지에 안장되었다.[123]

맨틀은 야구 선수로서 눈부신 업적을 남겼지만,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호지킨 림프종으로 일찍 사망하여, 자신 또한 일찍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 공포를 잊기 위해 음주에 빠졌다. 선수 생활 말년에는 숙취 상태로 타석에 들어서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등 행복하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삶을 살았다.

간암 진단을 받아 텍사스주댈러스의 베일러 대학교 메디컬 센터에 입원하여 생체 간 이식 수술을 받았으나, 암은 전신으로 전이되었고, 이듬해 8월 13일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 1개월 전인 7월, 맨틀은 "나는 좋은 본보기가 아니다. 제발 나처럼 되지 않기를 바란다."라는 말을 남겼다.

7. 유산

1969년 3월 1일 맨틀은 은퇴를 발표했고, 5년 뒤 자격 요건이 되자마자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양키스는 그의 등번호 7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126] 1969년 NBC에서 파트 타임으로 올스타전과 Game of the Week 같은 경기의 해설을 하기도 하였고, 1972년에도 파트 타임으로 몬트리올 엑스포스 팀의 해설을 맡기도 했다.

자유계약 제도가 도입되기 전이었어도 많은 연봉을 받던 맨틀이었지만, 사업 감각은 별로여서 몇 건의 잘못된 투자로 돈을 날리기도 했다. 그래도 스포츠 기념품 사업에서 대단한 위치를 지녔던 그의 위상은 1980년대부터 시작해 전 미국을 휩쓸었고, 그의 사후에도 인기는 계속되었다. 맨틀의 아이템은, 베이브 루스를 제외하고는, 어떤 선수의 아이템도 넘지 못할 판매를 기록하였다.

1983년, 뉴저지주 애틀랜틱 시티에 있는 리조트의 카지노에서 고객 담당 대표 일을 시작했다. 그의 활동 대부분이 골프 토너먼트와 다른 봉사활동의 얼굴마담 격이었지만 MLB 커미셔너 보위 쿤에 의해 야구계에서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쿤의 후임 커미셔너인 피터 위버로스(Peter Ueberroth)에 의해 1985년 3월 13일에 자격이 회복되었다.

1996년 8월 25일, 맨틀의 기념 공원 명판은 "위대한 동료"라는 문구와 함께 "비할 데 없는 용기의 유산을 남긴 훌륭한 양키스 선수"라는 문구를 담은 기념비로 교체되었다.[128]

새로운 양키 스타디움의 기념 공원에 있는 맨틀의 명판


1974년, 맨틀은 자격 첫 해에 전 동료 와이티 포드와 함께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30]

1998년, ''스포팅 뉴스''는 맨틀을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100인 중 17위로 선정했다.[131] 같은 해 그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센추리 팀에 선정된 30명의 선수 중 한 명이었다.[132] 2020년 ''더 애슬래틱''은 스포츠 작가 조 포자스키가 편집한 "야구 100" 목록에서 맨틀을 11위로 선정했다.[133]

2006년 맨틀은 동료 야구 전설 멜 오트, 로이 캄파넬라, 행크 그린버그를 포함한 4개의 시리즈 중 하나인 미국 우표에 등장했다.[135]

맨틀의 동상은 1998년 오클라호마 시티에 공개되었으며 트리플 A 오클라호마 시티 다저스의 홈구장인 치카소 브릭타운 볼파크의 미키 맨틀 플라자(2 South Mickey Mantle Drive)에 위치해 있다.[136]

2022년 8월, 민트 상태(SGC Mint+ 9.5)의 1952년 탑스 미키 맨틀 야구 카드가 1260만달러의 기록적인 가격에 판매되었다. 원래 1991년 50000USD에 구매했었다.[138]

8. 수상 경력

연도수상 내용
1956년아메리칸리그 MVP, 수위타자 (0.353), 최다홈런 (52개), 최다타점 (130개)
1957년아메리칸리그 MVP
1955년최다홈런 (37개)
1958년최다홈런 (42개)
1960년최다홈런 (40개)
1962년아메리칸리그 MVP, 골드글러브상
1952년~1965년, 1967년, 1968년올스타전 참가 (16회)
1965년헛치상
1974년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9. 통산 성적

통산 타격 성적
연도나이리그경기타석타수득점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도루볼넷삼진타율출루율장타율OPS
195119NYYAL9638634161911151365843740.2670.3490.4430.792
195220NYYAL1426265499417137723874751110.3110.3940.530.924
195321NYYAL1275404611051362432192879900.2950.3980.4970.895
195422NYYAL14665154312916317122710251021070.3000.4080.5250.933
195523NYYAL147638517121158251137998113970.3060.4310.6111.042
195624NYYAL1506525331321882255213010112990.3530.4640.7051.169
195725NYYAL144623474121173286349416146750.3650.5120.6651.177
195826NYYAL1506545191271582114297181291200.3040.4430.5921.035
195927NYYAL144639541104154234317521931260.2850.3900.5140.904
196028NYYAL1536445271191451764094141111250.2750.3990.5580.957
196129NYYAL15364651413116316654128121261120.3170.4480.6871.135
196230NYYAL1235023779612115130899122780.3210.4860.6051.091
196331NYYAL652131724054801535240320.3140.4410.6221.063
196432NYYAL14356746592141252351116991020.3030.4230.5911.015
196533NYYAL12243536144921211946473760.2550.3790.4520.831
196634NYYAL10839333340961212356157760.2880.3890.5380.927
196735NYYAL14455344063108170225511071130.2450.3910.4340.825
196836NYYAL1445474355710314118546106970.2370.3850.3980.782
통산2,4019,9098,1021,6762,415344725361,5091531,7331,7100.2980.4210.5570.977



미키 맨틀은 통산 타율 0.298, 출루율 0.421, OPS 0.977을 기록했다. 그는 2,415개의 안타를 기록했으며, 여기에는 536개의 홈런, 344개의 2루타, 72개의 3루타가 포함되어 있다. 맨틀은 5번이나 삼진 리그 1위를 차지하여 은퇴 당시 역대 최다 기록을 보유했지만, 볼넷을 얻는 데에도 능숙했다. 그는 5번이나 볼넷에서 메이저 리그 1위를 차지했으며, 한 시즌에 100개 이상의 볼넷을 10번 기록했다.[26] 외야수로서 그는 통산 수비율 0.982를 기록했다.[26]

맨틀은 1951년과 1966년을 제외하고 선수 생활 18년 중 16번 올스타로 선정되었다.[38] 그는 뉴욕 양키스에서 7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으며, 총 12번의 월드 시리즈에 출전했다. 월드 시리즈에서 그는 65경기에서 타율 0.257을 기록했으며, 홈런(18개), 득점(42점), 타점(40점)에서 역대 월드 시리즈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64]

분류G타율타수득점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도루도루실패볼넷삼진출루율장타율OPS보살어시스트병살타실책수비율
통산2,401.2988,1021,6762,415344725361,509153381,7331,710.421.557.9976,734290201107.985[26]



미키 맨틀은 화려한 수비수는 아니었지만, 메이저 리그에 진출한 후에야 중견수 포지션을 맡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반적으로 탄탄한 중견수였다. 케이시 스텡걸 감독은 그가 유격수로서 보여준 모습에 실망하여, 루키 시즌 전에 그를 외야수로 옮겼다.[73] 시간이 지나면서 맨틀은 수비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강력한 외야 송구를 개발했다.[74] 그의 외야 송구는 주자들이 추가 진루하는 것을 막았다. 중견수로서 넓은 수비 범위를 갖춘 그의 수비 능력은 '그의 공격적 천재성에 비견될 만한 덜 화려한 능력'으로 평가받았다.[75] 그는 자신이 수비수보다 타자로서 더 뛰어나다고 생각했지만, 돈 라르센의 퍼펙트 게임에서 보여준 그의 다이빙 캐치를 자신의 경력 최고의 플레이로 꼽았다.[76] 그는 나중에 이 플레이를 "내가 했던 유일한 좋은 캐치였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좋은 수비수가 아니었다."라고 언급했다.[77]

1960년 3년 연속 리그 최다 삼진(125개)을 기록했으나, 리그 최다인 40홈런, 119득점, 294루타, OPS .957의 성적으로 4번째 홈런왕을 차지했고, 팀은 2년 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피츠버그 파이리츠와의 1960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타율 0.400, 3홈런, 11타점의 활약을 보였지만, 최종 7차전에서 빌 마제로스키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아 패했다. 같은 해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에서 이적하여 타점왕을 차지한 로저 매리스와의 콤비가 '''MM포'''로 불리게 되었다. 1961년에는 두 선수 모두 개막부터 홈런을 양산하여, 베이브 루스가 가지고 있던 시즌 60홈런 기록을 깰 수 있을지 주목을 받았다. 결국 61홈런을 기록한 매리스가 기록을 갱신했지만, 맨틀도 커리어 하이인 54홈런을 기록했다. 같은 팀의 두 선수의 홈런 합계 115개는 2018년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MVP 투표에서는 매리스와 불과 4포인트 차이로 2위에 머물러 수상에 실패했다.[157]

1962년에는 1개월 간의 이탈도 있었지만 123경기에 출전하여 리그 최다인 122개의 볼넷, 출루율 0.486, 장타율 0.605, OPS 1.091의 성적으로 팀은 리그 3연패를 달성했지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1962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타율 0.120, 홈런 0개로 부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승 3패로 시리즈 2연패를 달성했다. 1963년 6월 5일 볼티모어 오리올스 전에서 펜스에 충돌하여 왼쪽 다리가 골절되어 2개월 간 전력에서 이탈했다. 65경기 출전에 그치는 등 만족스럽지 못한 시즌이었지만, 팀은 리그 4연패를 달성했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의 1963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4차전에서 샌디 쿠팩스로부터 홈런을 쳤지만 타율 0.133에 그쳤고, 팀은 쿠팩스와 돈 드라이스데일의 2명의 선발 투수에게 막혀 4연패로 패했다.

1964년 1964년 월드 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대결하여, 3차전, 6차전, 7차전에서 맨틀은 마지막이 된 시리즈 홈런을 쳤다. 하지만 타자에서는 루 브록, 켄 보이어, 커트 플러드를, 투수에서는 밥 깁슨을 보유한 카디널스의 공세에 노출되어 결국 3승 4패로 패했다.

1967년에는 통산 500호 홈런을 달성했고, 같은 해 양키스는 지구 최하위로 추락하여 최악의 상황 속에서 밝은 소식이었다. 마지막 시즌이 되는 1968년에는 0.230대로 자기 최저 타율을 기록했고, 결국 다음 해 1969년 시즌 전에 현역 은퇴를 표명했다. 등번호 "'''7'''"은 은퇴를 표명한 1969년에 양키스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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